한때 내 지인들이 열중하던'키워드 게임'이라는 것이 있다.
우선'만약 지금 당장 무인도에 가서 살아야 한다면'이라는 가정아래,
'꼭 가져가고 싶은 물건 열여섯 가지'를 종이에 차례로 쓴다.
그리고 열여섯 가지 물건들을 두 개씩 묶어서 둘 사이의 공통된 '키워드'를 찾는다.
예를 들어 '라이터'와'침낭'이 한묶음이라면
둘 사이의 공통분모, 즉 '따뜻함'같은 것이 하나의 키워드가 된다.
공통점은 반드시 리스트를 작성한 사람 스스로 찾아야 하며,
그 단어는 추상적이어도 좋고 구체적이어도 좋다.
이렇게 해서 여덟 개의 키워드가 나오면, 그것을 다시 두개씩 묶어
네개의 키워드를 뽑고, 네 개를 두개로, 두개를 한개로 줄여나간다.
마지막에 남은 한 개의 키워드가 바로 '인생의 키워드'이다.
이 게임을 하다 보면 몇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우선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물건들이란 게 의외로 적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열여섯 개? 너무 적잖아!'하고 리스트를 쓰기 시작하다가,
열 개도 못가서 더 이상 쓸 게 없다고 난감해한다.
급기야 마지막 대여섯 개는 '없어도 살아가는데 지장 없는'물건들로 채워진다.
둘 사이의 공통된 키워드를 찾다가, 세상을 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각과
자신의 시각을 비교해 보기도 한다.
라이터와 침낭의 공통점을'따뜻함'이라고 하는 사람과
'생존'이라고 하는 사람이 상대방의 다른 가치관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나타나는 인생의 키워드,
즉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객관적으로 읽게 된다.
소설 속의 인물이긴 하지만, 열여섯 가지 물건은 커녕
지푸라기 하나 없는 무인도에 떨어진 로빈슨 크루소라는 인간이 있었다.
'왜 조물주는 피창조물을 이렇게 무참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버리는 것일까.
이 세상에 태어난 것조차 뼈아프게 원망할 만큼 구원의 손길조차 닿지않는
진흙탕 속으로 처넣어 버리는 것일까'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눈앞에는 희망이라 이름 붙일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겨우 목숨은 부지했지만, 그 목숨을 이어갈수 있는 방법을 알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 생각을 고쳐먹는다.'나는 처참한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다른 동료들은 어디에 있는가? 글들은 죽고,
나는 죽지 않았다. 여기에 있는 것과 없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가?'
절망에 빠진 그에게 희망을 안겨준 것은 조물주도 아니었고 외부의 상황도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구원의 손길이 닿지 않는'무인도에 고립되어 당장 먹을 것과
잠잘 곳을 구해야 했으며 그를 구조해줄 배가 홀연히 나타날 기미는
아무데서도 보이지 않았다.그가 한 일이라고는 단지 생각을 바꾼 것뿐이었다.
'여기에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모든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인생의 키워드'가 돈이나 권력, 명예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인간의 삶이 그런 것으로 쉽게 행복해질 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도
이미 알고 있다는 얘기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리고,
생명을 위협하는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고,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잃고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해도,
우리는 여기에 있다.어찌 되었거나 여기에 있다.
그리고 최소한 이곳은 무인도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여기에 없다면, 절망도 없을 것이다.
살아 있어 절망이 있고, 그래서 희망도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믿고 싶다.
2003년 8월 23일 조선일보 [문화비전]
잠시 생각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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