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윤동환의 블로그에서
중국의 소설가 뤼신(魯迅)은 소설집의 서문에 친구와 나눴던 이야기를 적고 있다.
창문도 없는 철로 된 방안에 여러 사람들이 자고 있다. 곧 산소가 떨어져 모든 사람이 죽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의식을 잃어 혼수 상태에 있는데 곧 조용히 다 죽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깨어나 있는 상태에서 그들을 깨우면 잠이 좀 덜 들은 사람들은 일어나게 될 것이고 그들은 죽음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을 굳이 깨워서 그런 고통을 겪게 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 아닌가?
그런 질문에 어떤 친구가 이렇게 답했다 한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몇몇 사람이 깨어나면 그들은 철로 된 방을 부술 수도 있지 않은가?’
세상은 뤼신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출구가 없는 철 방과 같다.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예언이 가까스로 빗나간 것에 대한 감사를 잊어버린 인류는 현 상태에 문제가 없는 듯 착각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고 있다. 자연 파괴, 이산화 탄소 증가, 인구 증가, 전쟁, 인간성 파괴, 식량 식수 부족 등등 세기말의 문제는 지속되지만 답이 없는 행로를 걷고 있다. 우리에겐 뤼신처럼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하다.
뤼신이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문예 운동을 했듯이,
윤동주 시인이 절망의 시대를 살면서도 아름다운 시를 썼듯이.
플라톤의 모방 개념을 대입한다면 정치적 통제는 우주적 통제의 모방이다.
우리는 현상계에서의 해방과 우주적 차원에서의 해방을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체제의 문제는 인간 본성의 문제에 기인한다.
정치적 억압 구조의 근원은 현상계 자체가 억압 구조에 있기에 있다.
그러하기에 진정한 혁명은 자신을 개혁하는 ‘자기로부터의 혁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자신의 비겁과 게으름과 수치심과 한계를 넘어서면서 시작되어야 한다.
[출처] 2009년 3월 21일 오전 2시 41분에 저장한 글입니다.|작성자 Nom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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