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투병 중이던 수필가 장영희(서강대 영미어문·영미문화과) 교수가 9일 오후 1시 별세했다. 57세. 영미 시를 쉬운 언어로 소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강단에 복귀해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줬다. 마지막까지 창작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투병 중 집필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 곧 출간된다. 한국번역문학상·올해의 문장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대표와 언니 영자씨, 여동생 영주·영림·순복씨 등 네 자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이며 발인은 13일 오전 9시. 02-2227-7550.
‘소녀’.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말한다. 그처럼 맑은 감성을 지닌 어른을 본 적이 없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그 소녀는 장영희(사진) 서강대 교수다. 우리 시대 대표 수필가이기도 하다. 9일 암 투병 끝에 5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가 세상을 저주했을 것이라면 오산이다. 오히려 ‘정상인’과는 다른 체험을 유머와 위트로 승화, 문학적 재능으로 버무렸다. 수필과 신문 칼럼으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다. 2001년 유방암에 걸려 수술을 받고 완치됐지만 2004년 다시 척추암 선고를 받고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 다시 강단에 복귀했다. 그의 삶은 살아온 기적이었고, 사람들에게는 살아갈 기적이었다. 한 페이지만 찢어낼 수 없다. 우리들 각자가 저자인 삶의 책에는 절망과 좌절, 고뇌로 가득 찬 페이지가 있지만 분명히 기쁨과 행복, 그리고 가슴 설레는 꿈이 담긴 페이지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에는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나 병원에 있는 환자들이 더 뜨거운 반응을 보낸다.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생각하는 갈대』『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스칼렛』등을 번역했다. 중ㆍ고교 영어 교과서를 집필 하기도 했으며 한국번역문학상과 올해의 문장상 등을 수상했다. |
암투병 수필가 장영희 교수 별세
"하필이면 왜 내가 사랑받을까요?"
- 장영희 교수의 인생에 대한 에세이 형식의 인터뷰 (2000. 11월 기사) -
팔십사년의 무더운 여름날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과정 유학 중 잠시 귀국했던 장영희 씨는 여동생과 함께 명동에 옷을 사러 갔던
일이 있다. 명동 옷가게와 옷들을 함께 구경하던 여동생이 한 가게의 흰색 원피스가 마음에 들었던지 입어 보겠다고 했다.
마침 그 가게에는 지체장애우인 그로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높은 문턱이 있어 그냥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단다.
달리 입을 것이 없어 유학 시절 늘 즐겨 입던 허름하고 넉넉한 티셔츠에 낡은 청바지를 입고 나선 것이 화근이었을까.
시선을 가게 안 동생에게로 고정시켜 놓았던 그를 가게 주인이 발견하곤 “나중에 와요, 지금은 동전이 없어요”라며 거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여동생이 “지금 우리 언니를 뭘로 보고 있는 거예요”라며 옷을 갈아입다 말고 나와 주인에게 소리높여 항의하는
걸 보고서야 그는 자신이 거지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발을 짚으신데다 입성까지 그러셔서”라며 그 주인이
공손하고 겸연쩍게 사과를 했지만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명동에서 낡은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은 오히려 눈에 띌만한 차림이라는 것, 그것도 자신과 같이 양팔로 클러치를
짚은 장애우는 가난, 무지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존재라는 것, 자신의 현재 모양새가 “거지의 모든 필요 조건을 다 갖췄다”고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이 가슴에 남아 그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바로 다음 날부터 로션 하나 안 바르던
얼굴에 화장을 하고 청바지를 벗어 던지고 성장을 한다.
지금 장영희 씨는 십오 년째 서강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제는 더욱이 비싼 화장품과 옷들을 사며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것을, 그래서 피같이 아깝게 느껴진다는 아침 시간 십분을 립스틱과 분을 바르는 일에 쏟는 것을 그는 사명, 아니 희생으로까지
생각한다. 어차피 목발을 두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니까 자신의 제자들과 몸담고 있는 학교의 명예를 생각해서 그래도 동전 구걸
하는 거지로 보이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이러한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비슷한 장애 정도지만 집밖 출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다른 여성
장애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다른 가정환경에 놓여 있었다면 걸었을 수도 있는 한 장면과 그 얼굴들이 겹쳐지는 듯해 아슬
아슬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쨌든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장영희 교수는 선택받은 사람같다. 우선 많은 신앙인들이 종교적으로
해석하듯 하느님은 그를 선택해 장애를 갖게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서울대 사범대 교수였던 고(故) 장왕록
박사를 아버지를 뒀고, 자애롭고 자식들에게 헌신적이었던 어머니와 우애넘치는 다섯 남매들이 그를 늘 받쳐주었다. 그렇다면
그가 현재 이룬 성공이 모두 해명될 수 있을까? 결론은 이 글을 다 읽은 후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거지로 보이지는 말아야죠”
첫돌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밤, 고열에 시달리던 어린 딸을 달래는 어머니 옆에서 아버지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벌떡 일어
나며 “아, 소아마비!”라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설마, 내 딸이’하는 마음에 애써 부인하다가 불현듯 엄습해온 두려움을
느낀 아버지의 예감대로 그는 소아마비에 걸린 것이었고, 그로부터 다섯 살이 될 때까지도 제대로 앉지 못해 누워서 어린 시절을
다 보냈다. 소아마비열병이 지나고 난 뒤 사지 중에 그가 정상적으로 쓸 수 있는 건 왼손뿐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는 왼손잡이가 됐다.
“저 자랄 때만 해도 왼손잡이도 드물었어요. 그래서 서 있을 때는 목발 짚었다고 쳐다보고 앉아서 글씨 쓰면 또 희한하게 왼손으로
글씨 쓴다고 모두들 쳐다봤어요. 시험 칠 때 감독하는 선생님들도 와서 제 글씨 쓰는 것만 쳐다 보셨으니까요.”
다행히 오른손은 장애가 그렇게 심하지 않아 손을 내려뜨려 목발을 잡을 수 있고 컴퓨터 자판에 손을 옮겨 놓으면 자유롭게
글자를 입력할 수는 있다. 대신 피아노하고 기타는 못 치는데 원래 음악적 재능이 없던 터라 “전혀 안타깝지 않다”며 웃는다.
여섯 살 되던 해 부모님은 그를 일반 초등학교에 보내야 할지 재활원 부속 특수학교에 보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그러다 만만치
않은 재정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물리치료를 받고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아니 어쩌면 일반 학교에
가서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 연세대 재활원 특수학교에 맡기기로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부모님과 함께
재활원에 도착한 후 앞으로 그곳에서 지내게 될 것이며 기숙사 생활과 단체 생활이 필수조건으로 되어 있어 식구들의 면회도
한 달에 한 번, 게다가 집으로 갈 수 있는 것도 겨우 일 년에 몇 번만 허용된다는 규정을 그도 들었을까. 순간 필사적으로 악을
쓰며 울기 시작해 결코 울음을 그치지 않는 어린 딸을 차마 떼 놓을 수 없어 결국 부모님은 그를 다시 집으로 데려갔다.
그래서 일반학교인 종암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삼학년 때까지 어머니는 그를 학교에 업어서 데려다 주었고, 화장실에 데려가기
위해서 두 시간에 한 번씩 학교에 오셨다.
어머니에게 업혀 옮겨다니는 그를 보면서도 아이들은 쫓아다니며 놀리거나 그의 걸음걸이를 흉내내곤 했다니 당시 아이들의
철없음에 좀 어이가 없기도 하다. 그래도 공부도 학교에서 손꼽힐 정도로 썩 잘했고 글짓기 대회, 미술대회에 나가 상을 타기도
했다. 사학년에 다닐 당시 받은 아이큐 검사에서 그는 전교에서 두 번째로 높은 백오십삼이었다고 하니 딸을 데리고 가는
어머니의 발걸음이 생각보다 그리 무거웠던 것만은 아닐 게다. 물론 후천적 게으름뿐만 아니라 몇 차례 수술을 받느라 전신마취를
한 후부터 점차 낮아져 지금은 지능이 두 자릿수 모면할 정도가 됐다고 말하지만 말이다.
“날 떨어뜨린 교수님이 오히려 고맙죠”
그는 불행하게도 중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입학 시험이란 시험은 모조리 치른 세대다. 그러나 중학교 때부터 그는 우선 시험을
볼 수 있게 해주는 학교를 찾아 헤매야 했다. 성적은 꽤 좋았지만 아버지가 몇몇 중학교를 찾아 다니면서 시험을 보게 해 달라고
사정해도 그때마다 번번이 거절당하곤 했다.
그래도 아버지가 서울사범대 교수로 계셨기 때문에 서울사대부속중학교 교장의 개인적 배려로 시험을 칠 수 있었다. 단 체력장을
면제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류로 통하던 그 학교의 커트라인은 마이너스 사점이었고, 체력장에서 기본 점수밖에 받을
수 없는 그는 아예 처음부터 사점을 까먹고 들어가야 했다. 그것은 학과 시험에서 한 문제라도 틀리면 불합격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만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문제라도 틀리면 중학교를 갈 수 없고 자연히 고등학교도 갈 수 없어 자신의 인생은 끝장이라는 사실을.
그런 지독한 중압감에 시달리며 그는 공부에만 매달렸다. 입학 시험을 볼 즈음에는 너무 말라 턱이 주삿바늘처럼 뾰족하게 돼서
주사턱이라는 별명이 붙여질 정도였다. 앞날에 대한 불안으로 공부하다가 몰랐던 사실이나 정답을 알 수 없는 문제가 나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 앉고 경악과 절망감이 덮치곤 했는데 지금도 가끔 시험 보다가 모르는 문제를 만나 식은땀을 흘리는 꿈을
꾼다니 당시의 시험공포증이 어느 정도였는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그는 결국 시험에서 한 문제를 틀렸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그해 서울사대부중의 합격선은 다른 해보다 하나 낮은 마이너스
오점이었고 그래서 아슬아슬한 점수로 그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같은 부속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이제 대학교가
문제였다. 그가 대학에 들어간 것이 칠십일년도의 일이다. 현재의 장애우 특별전형 제도같은 것은 꿈꿔볼 수도 없었을 근 삼십 년
전의 일이라지만 당시 대학들은 장애우의 입학을 불허한다는 불문율같은 내부 규정이 있는 터였다. 그래서 전면적으로
맞부딪치게 된 높다란 장벽으로 인해 절실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역시나 직접 대학을 찾아다니며 그가 시험을 볼 수
있도록 선처를 부탁했다. 먼저 친구가 총장으로 있던 서울대에 가서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자네 딸이면 내 딸이나 마찬가지라
당연히 배려해주고 싶지만 만약 시험을 보고 합격을 한다면 내가 직원들을 설득한 자신이 없네”라는 얘길 들어야 했다. 지금도
아버지가 그 얘기를 듣고 낙담하여 어머니에게 사정 얘기를 전하던 날의 기억을 그는 잊을 수 없단다.
다음으로 혹시나 해서 찾아간 곳이 서강대였다. 가톨릭 집안인 분위기도 있고 미국 신부님들이 운영하는 학교라 좀 다르지 않을까
싶어 찾아가 시험을 볼 수 있겠냐고 물으니 그 외국인 신부는 너무나 놀라며 왜 그런 당연한 일을 묻느냐는 반응이었다.
좋은 성적을 갖고 있던 그는 당연히 합격을 했다. 언덕받이에 있는데다, 고등학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넓은 교정과 계단 많은
건물들이 그를 가로막았지만 비장애우들과 섞여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기쁨이었다고 한다. 굉장히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을만큼 원없이 공부하면서 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까지를 마쳤지만 역시나 여성장애우인 그를
사회에서는 받아주지 않아 취업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계속 공부를 하고자 했지만 서강대는 당시 박사과정이 개설돼 있지 않았기에 그는 인근 ㅇ대 박사과정에
지원서를 냈다. 그러나 오전에 필답시험을 보고 오후 면접을 위해 들어가 미처 자리에 앉기도 전에
“우리는 학부학생도 장애우는 받지 않아요.박사과정은 더 말할 것이 없죠”라는 한 면접교수의 말을 들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분들이 너무 고맙죠. 공부를 계속 하기로 했을 때 당시 국내 영문학 박사는 인정해 주지 않는 분위기를 알고는
있었지만 가족들과 떨어져 바다 멀리 미국으로 가는 일은 대단히 두려운 일이어서 용기를 못 냈는데 그 말을 듣고 결단을 내릴
수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학교를 돌아 나오면서 토플책을 샀고, 다음 해인 칠십팔년 팔월, 그에게 전액 장학금을 제의한 뉴욕주립대에 들어갔다.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는 뿌듯함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 그러나 홀로 낯선 곳에서 닥쳐오는 모든 일을 헤쳐가야 한다는 사실로 인한 두려움대로 역시 유학생활은
쉽지 않았다. 장애학생을 위한 유료 도우미형식의 인력지원제도는 미국 시민권을 가진 학생들만이 누릴 수 있었다.
그는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무거운 가방을 메고 차도 없이 서강대보다 몇십배나 넓은 교정을 걸어다녀야 했다. 게다가 그
학교가 있는 올버니란 지역은 서울보다 북쪽 지역이라 훨씬 춥고 눈도 많이 왔다. 눈이 삼사십 센티미터씩 쌓인 미끌미끌한 길을
목발로 걸어 다니는 일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휠체어 탄 학생들을 위해서는 모든 건물로 통하는 지하도로를 이용하도록
했지만 그 길은 너무 돌아가도록 설계돼 있어 목발을 짚은 그로서는 그 길도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 영문학 박사 과정에 있는 사람 가운데 미국인이 아닌 사람은 그 혼자였다. 그래도 학위를 마칠 즈음 담당 교수는
“자네 같은 여성이고 소수민족이고 장애우면 세 조건 다 법정 의무고용제도에 적용되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나 환영받을 걸세”
라며 미국에서의 취업이 손쉬울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줬지만 그는 일말의 갈등없이 귀국을 했다. 자신과 같은 한국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곳,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는 한국이 좋았기 때문이다.
서강대 영문과 졸업생 가운데 박사학위를 받은 첫 번째 사람이었지만 기대한만큼 교수임용이 빨리 되지는 않았다.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장애라는 것은 교수임용에도 걸림돌로 작용한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제 그는 영문과 교수로서의 탁월한 학문적 성과 외에도 〈종이시계〉, 〈햇볕드는 방〉 등 모두 열두 권의 책을 번역, 한국문학
번역상을 수상하기도 한 뛰어난 번역가이자, 중고등학교 영어교과서의 저자, 영자일간지 〈코리아 타임즈>의 명 칼럼니스트로서
확고한 사회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알고 보니 일주일에 하루 서강대 교내에 있는 야학, ‘성이냐시오학교’에 영어회화 강사로 자원
활동을 하는 등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삶에도 열심인 사람이다.
다른 무엇보다 영문학을 전공한 형제들은 많았지만 자신만이 아버지 장왕록 박사가 걸어간 길을 묵묵히 이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 스스로를 뿌듯하게 한다. 그는 아버지와 〈스칼렛〉, 〈살아있는 갈대〉를 함께 번역했고 아버지와 함께 영어교과서를 집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 번은 영어 교과서 집필 시안 설명회에 가서 다른 출판사 직원인 듯한 두 남자가 “난 고등학교 때
장왕록 씨 교과서로 배웠는데 우리 딸은 이 여자(장영희 교수)가 쓴 교과서로 배우더라구”라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듣고 그
어느 때보다 자랑스러웠다고 한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떳떳하고 당당하고 미안하지 않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양심과
성실함’을 가르쳐준 아버지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값을 한 것 같아서 말이다.
장애우 돕고 싶은 맘 글로 표현하고파
내년에 두 번째로 안식년을 맞게 되는 그는 다시 마음껏 공부하며 재충전을 위해 미국에 갈 날만 고대하고 있다. 그런 중에도
최근에 그는 샘터사에 연재하던 에세이등을 묶어 〈내 생애 단 한 번〉(샘터사)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인터뷰 간 날 한 학생이
전해준 바로는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집계에서 칠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는 “혜택받은 장애우로서 다른 장애우들을
돕고 싶은데 많이 그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칼럼을 쓰면서 소재 중의 많은 부분을 우리 사회에서 장애우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고 어떻게 대접받고 있는지를 구체적인 예를 통해 쓰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한국여성장애인연합, 보건복지부 등의 각종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그에게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선택받은 장애우로서 혹시 다른 장애우들에게 부채의식 같은 걸
느끼냐고 물었다.
“그런 게 없지 않아 있어요. 주변에 장애우들을 보면 저 사람도 나와 같이 좋은 부모님 밑에서 좋은 조건에서 태어났다면 저런
열악한 삶을 살지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죠.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면 저도 굉장히 많이 노력했다고 보거든요. 좋은 조건
플러스 제 자신의 노력이 있었죠. 제 입장에서는 후회없이, 정말 목숨걸고 노력을 해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 제가 가졌던 그런
조건이 없었다면 제가 아무리 발버둥쳤어도 불가능했겠죠. 다른 장애우들도 저와 같은 조건이었다면, 그리고 똑같이 교육을
받았다면 스스로 노력을 해서 충분히 의미있고 조금 더 남에게 무언가를 제공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에 가슴 아플
때가 많아요.”
물론 경제적인 여유가 전부는 아니다. 그의 아버지의 친구분의 딸도 그와 비슷한 정도의 장애를 갖고 있었는데 그 집은
경제적으로 넉넉하다는 이유로 가정교사를 데려다가 교육시키는 등 너무나도 보호해서 키웠기 때문인지 본인도 의례 노력은
할 필요가 없는 걸로 알아 지금껏 별다른 사회적 역할을 해내지 못한 채 오래 전부터 그냥 집안에서만 생활하고 있단다. 그러나
그의 부모님은 다른 형제들과 똑같이 그를 키웠고 일반학교에 보내 똑같이 경쟁하게 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더욱 그는 부모님께
감사한다.
“교육은 보석을 갈고 닦는 중요한 일이죠”
서강대가 장애우 특별전형을 실시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그는 장애학생들의 이런 저런 생활 적응을 돕는 지도교수로도 일하고
있다. 한 학기에 한 번씩 장애학생들과 간담회를 갖는데 그는 그 때마다 학생들에게도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있다고 감
떨어뜨려 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곤 한다.
“딴 사람보다 늦게 올라가고 올라가는 게 힘들어도 감나무를 직접 자신의 손으로 따야 입에 넣을 수 있는 거거든요. 대학생인 현재
까지는 부모님 살아 계시고, 교수님도 친구도 다 도와주지만 일단 졸업하면 감 따서 너 먹어라, 그러는 사람 절대 없거든요. 바깥
세계에서는 내가 할 수 있고 분명히 잘 할 수 있는 일인데도 다른 사람이 방해를 놓으면 그 일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니까 자신이 의지를 갖고 남다른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어요.”
장애를 가졌건 안 가졌건 모든 사람은 갈고 닦지 않은 보석이라는 것, 여기에 교육을 받으면 누구나 갈고 닦인 보석이 될 수
있는데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교육받지 못 한다면 결국 자기가 갖고 있는 재능도 발견 못하고, 발견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연마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사장된다며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소리 높여 강조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백미터 달리기를 할 때 장애우들은 몇십 미터 뒤에서 출발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불행히도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죠. 그럴 때
장애우에게 조금 더 시간을 주거나 다른 사람들의 위치를 조정한다거나 해서 동등한 기회를 갖게끔 하는 건 사회의 몫이지만
그 기회를 가졌을 때 그 기회를 정말 악착같이 이용하는 것은 장애우 스스로의 몫이에요.”
어찌 보면 사람들은 다 이기적이라고, 사람들이 장애우를 차별하는 것은 자기네들에게 짐이 될까봐, 자신들의 무언가를
뺏어갈까봐 그렇다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비장애우들이 원하는 것을 어떤 장애우가 갖고 있으면 그
장애를 무시해 줄 만반의 준비가 돼 있다고, 주어진 재능을 잘 개발해 남다른 빛을 갖고 있는 장애우가 있다면 산골 꼭대기에
있다고 하더라도 찾아갈 거라고 그는 얘기한다. 한때 유명했던 ‘산골소녀 옥진이’가 머리를 스쳤을까, 한 편으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나 여전히 그도 가끔씩 좌절감을 느낀다고 한다. 빈틈없는 성격일 것 같은 인상과 달리 다리 불편한 정도는 댈 게
못될 만큼 심각하다는 그의 방향치, 수(숫자)치, 기계치도 거기에 한몫을 한다. 아무튼 좌절감을 느낄 때면 이렇게 생각하며 다시
주먹을 불끈 쥔다고 한다.
“못한다고 아예 시작도 안 하고, 잘하지 못 한다고 중간에서 포기했다면 지금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장영희 교수 사설칼럼 - 쉰즈음에
연구실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데 갑자기 어깨가 결리고 손가락 관절이 쑤신다.
아픔을 호소하니 옆에 있던 조교가
“선생님, 오십견이신가 봐요. 오십 넘으면 어깨 아파진다는데…. 선생님 이제 오십
넘으셔서…” 하고 살짝 미소 띠면서 말한다.
맞아, 오십견이 올 때가 되었다. 50이라…. 가끔 내가 쉰이 넘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란다. 하루하루 꽁지 빠진 닭처럼 살아가면서, 그동안 내가 언제 서른을 넘기고
40대를 지나 쉰이 되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스무 살 초봄, 하늘이 유난히 파랗던
날 새로 맞춘 진달래색 코트를 입고 입학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강대 교문에 들어선
이후 내 삶의 필름은 색채를 잃어버렸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빠른 흑백 화면으로만
이어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쉰 살이 되어 지구상에 다시 떨어진 것처럼, 아직도 나는
쉰이라는 나이에 놀라고 익숙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스무 살… 나는 스무 살 청춘들과 살아간다. 아, 말만 들어도 그 끝없는 가능성과 희망, 아름다움으로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가져오는 나이. 손가락 관절 하나하나까지 나긋나긋하고 발에 스프링을 매단 듯 통통 가볍게 걷고 어떻게 저 비좁은
공간에 인간의 내장이 다 들어갔을까 의심될 정도로 가느다란 허리, 맑고 총기 있는 눈빛, 온몸으로 싱싱한 젊음을 발산하는
스무 살 학생들 사이에 쉰 살 내가 있다.
돌이켜 보면 내가 스무 살 때 쉰 살 난 사람들을 보면서 스무 살이 나이 먹어 절로 쉰 살이 되는 게 아니라 애당초 쉰 살로
태어나는 무슨 별종 인간들처럼 생각했다. 눈가의 잔주름과 입가의 팔자주름을 짙은 화장으로 필사적으로 감추고, 단순히
생물학적 연륜만으로 아무데서나 권위를 내세우고, 자신의 외로움을 숨기려고 일부러 크게 웃고 떠들고, 가난한 과거에 원수를
갚듯이 목젖이 다 보이게 입을 쩍 벌리고 밥을 먹는, 조금은 우스꽝스럽고 조금은 슬픈 존재들….
어떤 이들은 나이 들어 가는 일은 정말 슬픈 일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나이 들어 가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고, 노년의
나이가 가장 편하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살아 보니 늙는다는 것은 기막히게 슬픈 일도, 그렇다고 호들갑 떨 만큼 아름다운 일도
아니다. 그냥 젊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갈 뿐, 무슨 색다른 감정이 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또 나이가 들면 기억력은 쇠퇴하지만 연륜으로 인해 삶을 살아가는 지혜는 풍부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실감이 안 난다.
삶에 대한 노하우가 생기는 게 아니라 단지 삶에 익숙해질 뿐이다. 말도 안 되게 부조리한 일이나 악을 많이 보고 살다 보니
타성이 강해져서 그냥 삶의 횡포에 좀 덜 놀라며 살 뿐이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나이 들어 가며 조금은 새롭게 느끼는 변화가 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즉 세상의 중심이 나
자신에서 조금씩 밖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도 눈이 가고, 갑자기 잊고 지내던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해지고,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이 더 안쓰럽게 느껴진다.
단순히 나이 들어 감에 따라 취향이 좀 주책 맞아져서 그런지, 아니면 이젠 내게 내가 너무 식상한 소재라 남에게 더 관심이 가는 건지, 또 아니면 나야 어차피 떠날 몸이니 내가 간 뒤에도 꿈쩍 않고 남을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이 더 커져서 그런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살아 보니 사는 게 녹록지 않아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측은지심인지,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나뿐만이 아니라 남이 보인다. 한마디로, 그악스럽게 붙잡고 있던 것들을 조금씩 놓아 간다고 할까, 조금씩 마음이 순하고 착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결국 이 세상을 지탱하는 힘은 인간의 지식도, 열정도, 용기도 아니고 ‘착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 자체에 대한 연민,
내 자리 남에게 조금 내주는 착함이 없다면, 그러면 세상은 싸움터가 되어 금방이라도 무너질지도 모른다. 난 쉰이 넘어서야 겨우
그걸 깨닫지만, 스무 살 우리 학생들은 나보다 좀 더 일찍 깨달았으면 좋겠다.
장영희 서강대 교수·영문학
KBS 보이는 라디오 - 2007. 4. 25 / 4.26일 방송
장영희 (문학의 숲을 거닐다)
4.25
4.26
하필이면 - 장영희 -
몇 년 전인가 십대들이 즐겨 부르던 유행가 중에 ‘머피의 법칙’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가사가 대충 이랬다.
“화장실이 있으면 휴지가 없고, 휴지가 있으면 화장실이 없고, 미팅에 가도 하필이면 제일 맘에 안 드는 애랑 파트너가 되고, 한 달에 한 번 목욕탕에 가도 하필이면 그날이 정기 휴일이고” 등등 “무슨 일이든 어차피 잘못되게 마련이다”라는 ‘머피의 법칙’을 코믹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노래에 나오는 ‘하필이면’이란 말은 분명히 ‘왜 나만?’이라는 의문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남의 인생은 별로 큰 노력 없어도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갈 뿐더러 가끔은 호박이 넝쿨째 굴러 오는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내 인생만은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걸핏하면 일이 꼬이고, 그래서 공짜 호박은커녕 내 몫도 제대로 못 챙겨 먹기 일쑤냐는 것이다.
그런데 억울하기 짝이 없는 것은 그게 내 탓이 아니라는 거다. 순전히 운명적인 불공평으로 인해 다른 이들은 벤츠 타고 탄탄대로를 가는데, 나는 펑크 난 딸딸이 고물차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가고 있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나도 ‘머피의 법칙’을 생각할 때가 많다.
한 예로 내 열쇠고리에는 겉으로는 구별이 안 되는 열쇠가 두 개 달려 있는데, 하나는 연구실, 또 하나는 과 사무실 열쇠이다. 열쇠에 유성 펜으로 방 번호를 표시해 놓으면 그만이지만, 그러기도 귀찮고 또 그냥 재미도 있고 해서 내 방에 들어갈 때마다 둘 중 아무거나 꽂아 본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수학적으로 따져 볼 때 확률은 분명히 반반인데, ‘하필이면’ 연구실 열쇠가 아니라 거의 과 사무실 열쇠가 먼저 손에 잡혀 두 번씩 열쇠를 돌려야 하는 일이 열이면 아홉이다.
그뿐인가, ‘하필이면’ 큰 맘 먹고 세차한 날은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비가 오고, 무엇을 사기 위해서 줄을 서면 바로 내 앞에서 매진되고, 더욱이 얼마 전에는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내 어깨에 새똥이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나는 망연자실, 한동안 서서 나의 ‘하필이면’의 운명에 경악했다. 1천만 서울 인구 중에 새똥 맞아 본 사람은 아마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텐데 ‘하필이면’ 그게 나라니!
물론 이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하필이면’도 있다. 남들은 멀쩡히 잘도 걸어 다니는데 왜 하필이면 나만 목발에 의지해야 하고, 어떤 사람은 펜만 잡으면 멋진 글이 술술 잘도 나오는데 왜 하필이면 나만 이 짤막한 글 하나 쓰면서도 머리를 벽에 박아야 하는가. 그렇다고 다른 재주가 있느냐 하면 노래, 그림, 손재주 그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나름대로의 재능을 골고루 나눠주신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필이면’ 나만 깜빡하신 듯하다.
언젠가 치과에서 본 여성지에는 모 배우가 화장품 광고 출연료로 3억 원을 받았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3억이면 내가 목이 쉬어라 가르치고 밤 새워 페이퍼 읽으며 10년쯤 일해야 버는 액수인데, 여배우는 그 돈을 하루 만에 벌었다는 것이다. 그건 재능이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타고난 생김새 때문인데, 그렇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한 일이다.
나는 내가 잘빠진 육체는 가지지 못했어도 그런대로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아마 내 아름다운 영혼에는 3억 원은커녕 3백 원도 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둘 다 못 가지고 태어날 바에야 아름다운 몸뚱이를 갖고 태어날 일이지 왜 ‘하필이면’ 3백 원도 못 받는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태어났는가 말이다. 그래서 ‘하필이면’이라는 말은 내게 한심하고 슬픈 말이다.
그런데 어제 저녁 초등학교 2학년짜리 조카 아름이가 내게 던진 ‘하필이면’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길거리에서 귀여운 팬더곰 인형을 하나 사서 아름이에게 갖다 주자 아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데 이모, 이걸 왜 하필이면 내게 주는데?” 하는 것이었다.
다른 형제나 사촌들도 많고, 암만 생각해도 특별히 자기가 받을 자격도 없는 듯한데,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는 아름이 나름대로의 고마움의 표시였다.
외국에서 살다 와 우리말이 아직 서투른 아름이가 ‘하필이면’이라는 말을 부적합하게 쓴 예였지만, 아름이처럼 ‘하필이면’을 좋은 상황에 갖다 붙이자 나의 ‘하필이면’ 운명도 갑자기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누리는 많은 행복이 참으로 가당찮고 놀라운 것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기에,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내가 훌륭한 부모님 밑에 태어나 좋은 형제들과 인연 맺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살고 있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내가 무슨 권리로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없이 편하게 살고 있는가.
또 나보다 머리 좋고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내가 똑똑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가. 게다가 실수투성이 안하무인인데다가 남을 위해 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 장영희를 ‘하필이면’ 왜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사랑해 주는가(우리 어머니 말씀으로는 양순하고 웃기 좋아하는 나의 성격 때문이라는데, 그렇다면 잘빠진 육체보다 아름다운 영혼을 타고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하필이면’의 이중적 의미를 생각하니 내가 지고 가는 인생의 짐이 남의 짐보다 무겁다고 아우성쳤던 좁은 소견이 새삼 부끄럽다. 창문을 여니, 우리 학생들이랑 일산 호수공원에 놀러 가기로 한 오늘, ‘하필이면’ 날씨가 유난히 청명하고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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