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앎
앎, 그저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인지하고 있는 상태, 혹은 특정 지식을 습득하거나 체화시켜 둔 것.
과연 그게 다일까?
진정한 앎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선과 악, 밝음과 어둠, 기쁨과 슬픔처럼 이분법으로 사고한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대개의 삶이란 선이면서 악이고, 밝으면서 어두우며 기쁘면서 슬픈, 그야말로 얽히고 섥힌 혼돈의 상태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항상 인지부조화를 겪고 절망하고 좌절한다. 아, 내가 알고 있는 무언가는 잘못된 것이구나 하면서 실망한다.
하지만 애초에 그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삶과 괴리되어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걸 가지고 실망을 한다는 것 자체가 다소 이상한 것이다. 애초에 파란 하늘이었던 것인데, 붉은 하늘로 굳게 믿고 있다가 어느날 올려다보니 파랗다고 좌절한다면 웃긴 일이 아닌가?
인간은 자기들이 편한대로 세상을 규정하고 설명하려 해왔고, 그러한 것들이 우리가 배우는 '지식'이 됐다. 그 지식은 '문명'을 만들기도 했지만, 본연의 삶으로 부터 인간 스스로를 분리시키기도 했다. 때론 설명의 편의성 때문에, 혹은 효율성 때문에, 하여튼 기타 여러가지 방법론적 이유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지식'은 어느새부턴가 '본연의 것'을 능가하는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고, '교육'이란 제도적 장치를 통해 가감없이 우리들에게 아주 어릴적 부터 주입되어 왔다. 따라서 문명하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그러한 '지식'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러다 보니 진정한 앎이란 '본연의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돼 버렸다. 우습지만 우리는 이제 다시 파란 하늘은 파랗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이분법을 부수고, 근대적 사고 방식을 의심하며, 하여튼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모든 것들, 우리가 체화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정말 본연의 삶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인지 일일이 의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다.
뭐 어쩌겠는가, 그게 있는 그대로의 무언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면 번거롭더라도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 본연의 앎을 수단적 앎의 상위 개념으로 다시 돌려 놓을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최선'이라는 개념을 한 번 생각해 보자.
혼돈의 세상에서 결국 그 어떤 결과도 완전히 선이거나 기쁨일 수는 없기에, 그러니까 모든 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최선'뿐이라는 것이 본연의 앎이라면, 그저 결과의 부족을 합리화하기 위해 '최선'이라는 말을 쓴다고 생각하는 것이 수단적 앎이다.
얼핏 말장난인 것 처럼 보여도, 전자의 '최선'과 후자의 '최선'은 방향성이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또 다른 최선을 향해 나가는 것이 설렘이고 두근거림이라면, 후자는 또 다른 최선이야 말로 '실패'의 다름 아니며, 따라서 두려움과 억울함이다. 전자는 엄청난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생성하며, 후자는 그나마 얼마 없는 에너지를 고갈하면서 끊임없이 자신감을 갉아 먹는다.
이처럼 제대로 된 앎을 알아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게 감정과 행동으로 까지 연결된다. 그저 '머릿속'이라고 하는 역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지식의 부자연스러운 한계가 자연스럽게 깨지는 것이다.
지식채널e는 항상 이러한 본연의 앎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지식채널e는 항상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신화'를 깨며, 그 신화 뒤에 있던 인간의 진정한 얼굴을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희망이든 절망이든 본연의 무언가라면 그것은 결국 우리가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추구하고 모색할 수 있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지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동시에 진정한 지식을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